박승종(朴承宗 1562〜1623)

자는 효백(孝伯)이요 호는 퇴우정(退憂亭)이다. 지돈녕(知敦寧) 안세(安世)의 아들이며 관원(灌園) 계현(啓賢)의 손자이다. 외조는 창원인(昌原人) 의창군(義昌君) 황림(黃琳)이고 배위는 정경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와 완산이씨(完山李氏)이다. 처부는 증참판 김사원(金士元)과 완풍부원군 이서(李曙)의 서매(庶妹)이다. 1585년(선조18) 진사시(進士試)에 2등하고, 1586년(선조19) 9월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봉교(奉校)에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1592년(선조25)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여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어 선무원종1등(宣武原從1等)과 호성원종1등(扈聖原從1等)의 공훈(功勳)으로 선조(宣祖)의 어필(御筆)과 묵난(墨蘭) 묵죽화(墨竹畵)를 하사(下賜)받고, 1593년(선조26) 지평(持平), 병조정랑(兵曹正郞), 장령(掌令), 헌납(獻納), 집의(執義), 동부승지, 1597년(선조30) 예조참의, 우부승지(右副承旨), 1599년(선조32) 대사간(大司諫), 병조참의(兵曹參議), 1600년(선조33)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01년(선조34) 호조참의, 귀성부사(龜城府使)를 거쳐 1603년(선조36)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1604년(선조37)에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1607년(선조40)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우부빈객(右副賓客)를 거쳐 1609년(광해1)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가 되었다. 1611년(광해3)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손녀(孫女)가 광해세자(光海世子) 지(祗)의 빈(嬪)으로 들어가자 왕실(王室)과 인척(姻戚)됨을 두렵게 여겨 항상 몸에는 가죽주머니에 비상(砒霜)을 지니고 다녔다.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고, 1614년(광해6)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1617(광해9)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인목대비를 보호하고 사저(私邸)에 읍백당(挹白堂)이란 당호까지 걸었다. 우찬성(右贊成)과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1618년(광해10) 좌의정 겸도체찰사(左議政兼都體察使), 1620(광해12)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어서는 명나라와 청나라(후금국)의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1623년 3월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유서(遺書)를 남기고 아들 경기감사(京畿監司) 자흥(自興)과 함께 자순(自殉)하였다. 홍호(洪鎬), 이준(李埈), 안방준(安邦俊), 송시열(宋時烈) 등의 신원 상소(伸寃上疏)로 1857(철종8) 정사(丁巳) 6월 13일에 관작(官爵)이 복권(復權)되고, 숙민(肅愍)[집심결단왈 숙(執心決斷曰肅)이요 사민비상왈 민(使民悲傷曰愍)]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